언제:2016년 5월10일 화요일
누가:양지회
어디에;강진
밤새 억수로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난 밤잠을 설쳤다.
아침에 일어나니 그떄까지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공기는 신선했고 물먹은 연두빛 잎새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비오는것이 걱정이 되질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이침을 준비해서 남은 반찬 톡톡 털어 맛있는 아침을 먹고
마지막 설겆이는 희자가 맡았다...허리가 아픈 희자를 시켜 먹는 것이 못내 미안하긴 했지만
괜찮다며 끝까지 남은 설겆이를 다 해 내고야 말았다...언제나 마음 착한 영낙없는 시골 아낙네이다...
설겆이가 끝나고 아름답고 멋진 이 숙소를 그냥 두고 떠나기가 아쉬워 단체사진도 찍고...
드디어 출발이다...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맞아가며 산허리에 걸친 운무를 배경으로 난 친구들 사진을 찍어 주었다.
제암산 휴양림이여 안녕~~~~~!!
꼭 다시오마~..
그렇게 휴양림을 떠나서 우린 다산초당으로 갔다...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의치않고 우산을 쓰고 길을 나섰다.
두충나무 길도 여전히 그대로 였다..
몇년전 이곳에 와서 난 이석증으로 쓰러졌었는데 그떄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렇게 멋진 길을 걸어 우리는 다산초당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비는 꾸준히 내렸고 신발도 바지도 젖어 가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래도 그냥 좋았다.
깔깔거리며 이팔청춘들처럼 그렇게 재미있게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다신초당으로 올라가는 언덕밑이다.
난 숙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다산명가 를 네비에 치고 오라고 일러주고는 다산초당으로 올라갔다.
초입에 있는 찻집이다.
초당으로 올라가는길은 나무뿌리가 모두 드러나 있었다.
큰 고목나무의 상징처럼 뿌리가 도드라져 올라와 있었다.
초당의 마지막 관문 돌계단이다. 친구들이 힘들게 올라가고 있다.
이젠 늙어서 올라가는일이 쉽지가 않다...어느새 초등학생들이 노인이 되었다...
초당 마루에 걸터 앉아서 사진을 찍었는데 빗줄기가 제법 굵다.
강진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무려 18년간 유배됐던 곳이다.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산의 형제는 약현, 약전, 약종이 있는데 이들 4형제는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첫째 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며,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고 또한 이들 4형제의 누이가 이승훈의 부인이다.
순교한 셋째 약종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데 이어 복자가 되었으며, 이미 성인이 된 정하상과 정정혜가 그 자녀다.
다산은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대재를 지키며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
그는 이런 참회와 기도의 생활 가운데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유고』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했다.
특히 『만천유고』에는 이벽의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와 같은 주옥같은 글들이 담겨져 있다.
석기산이란다...다산은 연못을 크게 만들고 가운데에 돌을 쌓아 놓고 석기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엘 몇번을 왔어도 이 돌은 처음 보았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는 글씨이다.
정약용의 정 씨를 따서 쓴것이라고 한다...글씨에 힘이 있다...
다산 명가이다..다음에 갈땐 이곳을 네비로 찍고 가면 더 편하게 다산초당에 오를 수 있을거란 생각이든다.
다음 목적지는 가우도 출렁다리이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으면 바람도 간간히 불어서 우산을 쓰기도 불편했다.
바닷가라서 그런거보다..
가우도는 강진군의 8개 섬 가운데 유일한 유인도로 섬의 생김새가 소의 멍에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으며 14가구 30여 명이 사는 아주 작은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며.
섬 내부에는 후박나무 군락지, 대나무 숲, 곰솔, 사스레피 등 자생하고 있는 다양한
산림자원과 갯벌에서 난 꼬막, 바지락, 낙지 등 싱싱하고 맛 좋은 해양자원이 매우
풍부하다고 합니다.
양쪽으로 연결된 출렁다리를 건너 섬에 도착하면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생태탐방로 함께 해(海)길 2.5km는 산과 바다를 감상하여 걸을 수 있는
천혜의 트레킹 코스로 최근 전남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된 이후
주말 평균 3,000여 명의 관광객이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다리의 바닥을 유리로 만들어 바닷물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난 무서워서 옆으로 돌아서 걸었다.
바닷가로 나무데크가 놓여져 섬을 한바퀴 돌아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비만 안 왔으면 섬 전체를 한바퀴 돌아 볼 수 있었을텐데 그것이 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리를 건너서 본 출렁다리이다..그런데 이름만 출렁다리일뿐 다리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비가 와도 우리는 여전히 사진을 찍으면서 다녔다.
안그러면 우리 양지회가 아니다....ㅎ
너도 찍어야지 하면서 삼순이가 찍어 주었다...
그런데 좀 멀리서 찍었어야 배경이 멋지게 나오는 건데 나무 가까이서 찍었어 삼순아..
김영랑 시인의 동상이다....이곳이 김영랑 시인이 탄생한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우도에서 우린 사의재로 넘어갔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와서 처음 머물렀던 곳이란다.
사의재란...생각,용모,언어,행동 네가지를 마땅히 바르게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이란다.
역시 다산 정약용 다운 생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름하기 그지없는 이곳에서 다산이 머물렀단다..
정약용이 유배왔을떄부터 있던 주막이다...일명 동문 주막이다.
그런데 지금도 이곳에선 음식을 판매하고 있다...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는 음식을 판매한다.
주막의 내부 천정이다.
가격도 아주 착한가격이다.
이것은 추어탕..
이것은 매생이전이다.
주모상이다...정역용이 유배를 와서 처음 만났던 주모와 딸이다..
유배 생활을 하는 정약용을 4년간 극진히 보살펴준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상하게도 이곳에서 걔속 머무르고 싶었다..
경치가 좋은곳도 아니건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쓰였고 머무르고 싶은 곳이었다.
일명 함박꽃이라고 부르는 이 불두화는 내친구들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음 코스는 영랑 김윤식 시인의 생가였다..
영랑이 1903년에 태어나 1948년 9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45년간 살았던 집이다.
영랑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으나
1985년 강진군청이 그 집을 다시 사들여 복원작업을 하였고
원래 초가집의 원형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1986년 2월 17일 전라남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0월 12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되었고, 강진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영랑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강진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수학중 기미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감추어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동년 4월 4일 강진장날 만세운동을 기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적을 두었으며 용아 박용철 선생과 친교를 맺었다.
1921년 일시 귀국하고, 1922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청산학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수학중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시문학 창작활동을 하였다.
1931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선생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시작활동에 참여하여
동년 3월 창간호에 「모란이 피기까지」 등 4행 소곡 6편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 『영랑시집』을 발간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고향인 강진에서 대한청년단을 이끌었고, 1948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였다.
1945년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7개월간 일했다.
1950년 6·25동란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은신하였으며
9·28수복작전 때 복부에 포탄 파편을 맞아 동년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네이버지식백과에서 퍼온글)
돈나무가 이렇게 큰것이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시비가 서 있고 그 옆으로 모란꽃이 잔뜩 있었는데 이미 지고 말았다.
참 아쉬운 부분이었다.
시인의 생가답게 집 여기저기 시비가 서 있었다.
초가 지붕에 흙담...
정말 정겨운 모습이 아니던가...
안채의 모습이다...모란은 여기저기 정말 많았다.
오래된 집 답게 뒷곁에 고목의 동백나무도 있었고 마당곁에 있는 나무들도 모두 고목이었다..
정갈한 마루...
그 마루에 앉아서 기념 사진 한컷..
다음은 금서당이란 곳으로 갔다..
금서당(琴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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