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찰,한옥

강진 시인 영랑 김윤식 생가

 

 





 





 





 





 





 





 





 





 





 





 





 





 


영랑(永郞) 김윤식(1903-1950) 시인의 본명은 윤식(允植)으로 강진읍 출생이다.

서울 휘문의숙과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공부하였다. 1930년<시문학>동인으로

 참가하여〈동백 잎에 빛나는 마음〉외 80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등 국문학사에 빛나는 서정시를 남겼다. 광복 후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다 6·25전쟁 때 서울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김영랑의 시어에 나타난 '조국광복'의 그리움과 기다림의 노래는‘모란이 지고난 후 찬란한

슬픔의 봄’으로 은유되었다. 그의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은 일찍이 14세이던 1917년 11월

 휘문의숙 재학시 시골에서 상경한 동생과 종로 4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헌병들에게 끌려가 고문을 받는다. 다행히 학생 신분이라 풀려나긴 했지만 그는 당시의

심경을 ‘나라를 빼앗긴 노예의 생활’로 자조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자신의 구두깔창 밑에 감추어 가지고 고향인 강진으로 내려와,

 4월 4일 강진 장날 만세운동을 기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6개월 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아픔을 겪는다.

출옥 후 일제의 감시로 국내에서 학업이 어렵게 되자 적지인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독립운동 전과자라는

오명 때문에 일본에서도 쫒기는 몸이 되다시피 한다.

이 때 후일 일본 황실 폭파미수에 그친 박 열 등과 함께 하숙을 같이하며 영랑은 고향에서 부쳐온 학자금을 독립자금

으로 제공하는가 하면, 일본 내 조선인학생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체포되기도 한다. 학업중 후일 문학적으로

평생지기가 된 박용철, 정지용 시인 등과 교우하게 된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학살정책으로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고향인 강진에 정착한다. 

 

영랑의 작품세계를 음미해 보자면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시기에 쓰인 시가 대부분으로 그의 작품세계는 순수한 남도

 우리말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표현해 내었다. 시문학사상 순수 서정시인으로 분류되는 김영랑은 나라와 언어·종교와

 신체적 자유를 잃은 고통과 슬픔의 절규를 우회적으로 아름다운 우리의 말과 서정적인 글로 그려내, 빼앗긴 조국과

 민족의 희망을 노래한 민족주의 애국시인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평생 한복을 즐겨 입고 스포츠를 즐기며 시를 좋아한 영랑은 또한 동서양의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아악에 정통하고

북(鼓)으로 이름이 알려지는 등 이러한 음악에 심취했던 것이 뒷날 그의 독특한 시 언어에 표현되어 나타나났다.


2016,5,10

'.........사찰,한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가헌과 하현정  (0) 2016.08.11
영동 반야사  (0) 2016.08.11
강진 사의재와 주막  (0) 2016.05.17
강진 다산초당  (0) 2016.05.17
정순왕후 생가  (0) 2016.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