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25년 5월26일 월요일
또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다..여기와서는 시간 개념이 없어진 것같다.
날짜가 가는건지 안가는건지 몇일인지도 구분이 안된다 참 이상한일이다.
로레토를 떠나 우리는 드디어 아씨시로 가고 있다...
오늘도 변함없이 신부님의 기도는 계속 되었다..여기에 언급은 안했지만 날마다 버스를 타면
신부님께서는 순례자의 기도로 시작해서 아침기도 가정을 위한기도 자녀를 위한기도 사제를 위한기도묵주기도와
성가는 모두 4절까지 부르셨다..최정열 안드레아 신부님 이름처럼 정열적이시다.
그래서 기도도 정열적으로 하신다..ㅎㅎ 지금 우리 순례자들의 목자이시니 그러실 수 밖에 없으실것이다..
신부님 덕분에 은총이 더하는 순례가 되었다..
아씨시의 지역은 크게 두지역으로 구분되어 진다...프란치스코 성인이 사셨던 12,13세기 그 당시에 아씨시는
산중턱에 도성을 쌓고 그 안에 모여 살았지만
오늘날엔 아씨시가 확장되어 쉽게 구분해서 평야 지역과 산악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오늘 오전에는 아랫동네에 있는 천사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을 순례하게 된다.그리고 버스로 이동해서
윗동네로 올라가서 점심을 먹고 윗동네 순례를 할 것이다
여기는 아랫동네에 있는 천사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이다..이곳은 365일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곳이다..
1569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천사들의 성 마리아 대성당은 성 프란치스코의 삶과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성지이다.
대성당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기원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들 중의 두 곳을 소중하게 품고 있다:
‘포르치운쿨라’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에 있어서 심장과 같은 장소이며, ‘
통과 경당’은 성인이 죽음을 거쳐 천상 하느님께로 나아간 곳이다.
천사들의 성모마리아대성당 정면의 모습이다.
여기서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참 안타까웠다.
천사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안에 있는 작은 성당 포르치운콜라 성당이다.이 사진은 제노베파 자매님이 주었다.
포르치운콜라 (Porziuncola)는 15세기에 축성한 성 마리아 대성전 중앙에 있는 작은 성당을 가리킨다.
프란치스코가 도착한 1200년 무렵 이곳에는 승천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허술하고 인적이 드문 작은 성당이 있었다.
그 당시 이 성당은 떡갈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채 버려진 상태였다.
프란치스코는 성당의 보수작업을 손수했으며, 이곳을 자신과 동료 수사들의 삶의 본거지로 삼았다.
25살의 프란츠시코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처음 접하고 난 후에 포르치운콜라에서
또 다시 그분 현존을 체험하고 나자 지체하지 않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 이후로 근본적인 가난을 살기 위해 세상을 버렸고 예수님의 사도로서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성인은 포르치운콜라에서 첫 형제들을 받아들였고,
1211년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글라라 성녀의 착복식과 더불어 글라라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이곳에서 성인은 초창기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총회를 개최하였고,
포르치운콜라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평화의 선교사가 되도록 초대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모 마리아의 중재로 포르치운콜라에서 프란치스코에게 발현하셨다.
1216년 8월 2일 교황 오노리오 (Onorio) 3세는 성인의 요청으로
이곳 포르치운콜라를 방문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아씨시의 용서’ 라는 특별한 대사를 주도록 허락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대성당 제대 후면 안쪽에 위치한 ‘통과 경당’에서 1226년 10월 3일 저녁에 찬미가를 부르며 죽음을 맞이하였다. 대성전 오른쪽에는 유혹에 빠진 성인이 장미 가시 사이로 몸을 숨긴 ‘장미의 정원’과 밤에 잠시 휴식을 취한 ‘장미 경당’이 있다.
영성적, 역사적, 예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박물관과 거대한 대성전은 위대한 작품들로 가득 찼다.
성당 맨 위에 금빛 찬란하게 성모님께서 빛나게 서 계신다...성모 어머니 저는 당신께 의탁하나이다.
이제 산위의 아씨시로 간다 저멀리 그 모습이 위풍당당하게 보인다..
요한바오로2세 주차장에 버스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올라간다.약 15분 정도.
그야말로 중세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타임머신을 탄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것들이 이곳에는 즐비하다..도시 전체가 그야말로 박물관인 셈이다.
멀리서 봐도 참 멋지다...
산악동네에서 바라다 본 아래동네 아씨시이다.저 곳에 천사들의 성 마리아 대성당이 있는것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성안으로 들어가는것 같다.
이곳이 산위의 아씨시의 중심부가 되는 곳인것 같았다..이 건물 앞에 광장이 있었으니까..
일단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는 중이다.
여기 피자집이다..
이 식당 건물이 2천년이 넘은 집이라고하니 입이 떡 벌어졌다...
분위가 참 좋다...우리 식구들..이젠 정말 한식구가 되었다..신부님께서 건배 제의를 하셨다.
피자에다 파스타에다 배가 엄청 부르게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이상하게 이렇게 매일 밀가루를 먹는데
속이 거북하지가않다 .참 신기하다.점심을 먹고 이제 본격적인 순례의 시작이다.
복자 카를로 아쿠틱스의 유해가 모셔진 산타 마리아 마조레성당 MZ세대의 첫 성인이 되실 분이다
교황님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성인식이 미뤄졌다고한다..5살때부터 묵주기도를 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고해성사를 했다니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 사람이었지 싶다.
카를로 아쿠티스는 1991년 5월 3일 영국 런던에서 부유한 이탈리아 가문 출신인
안드레아 아쿠티스와 안토니아 살자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쿠티스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런던과 독일에서 일했으며, 1991년 9월 그가 태어난 직후 밀라노로 이주했다.
아쿠티스는 1997년 9월 밀라노의 산 카를로 학원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교가 집에서 멀었기 때문에 3개월 후 성 마르첼리나 수녀회가 운영하는 마르첼리네 톰마세오 학원으로 전학했다.
중학교를 마친 후 아쿠티스는 예수회 레오네 13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학교 밖에서 아쿠티스는 노숙자와 빈곤층을 위해 자원봉사를 했다. 그는 또한 영화, 만화 편집, 비디오 게임을 좋아했다
아쿠티스는 체중 조절에 어려움을 겪었고 종종 누텔라를 과다섭취했다.
희생의 의미로 그는 단것이나 좋아하는 영화를 절제했는데,
이는 프란치스코회가 실천하는 청빈을 존경하고 이를 본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1998년 6월 16일, 7세 때 아쿠티스는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아드 네무스 수도원에서 첫 영성체를 받았다. 아쿠티스는 또한 자주 성체를 모셨고 성체 조배에 참석했다.5년 후인 2003년 5월 24일 산타 마리아 세그레타 성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았다
주변 사람들은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한 그의 열정과 기술 때문에 그를 "컴퓨터매니아"로 여겼다
14세 때 본당 신부가 그에게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세그레타 본당을 위한 웹페이지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고등학교 신부가 자원봉사 활동을 홍보하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작업으로 그는 "Sarai volontario"(자원봉사자가 될 것이다)라는 전국 대회에서 우승했다.
2006년 10월 1일, 아쿠티스에게 목 염증이 생겼다. 부모는 그를 의사에게 데려갔고,
이비인후선염과 탈수 진단을 받았으며 가족의 친구인 두 번째 의사도 이를 확인했다.
며칠 후 아쿠티스의 통증이 악화되고 소변에 혈액이 섞였다.
10월 8일 일요일, 아쿠티스는 미사에 갈 수 없을 정도로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약해졌다.
아쿠티스는 혈액 질환 전문 클리닉으로 옮겨져 급성 전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회복 가능성은 낮았다.그는 중환자실로 옮겨져 인공호흡기를 착용했다.
불면의 밤을 보낸 후, 아쿠티스는 그의 상태를 치료할 수 있는 이탈리아의 3개 병원 중 하나인
밀라노 북부의 산 제라르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 직원들은 원목을 불러 병자성사를 집전했다. 간호사가 그를 돌보러 왔을 때, 아쿠티스는 부모님이 이미 매우 피곤하시니 깨우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더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쿠티스는 자신의 고통을베네디토16세교황 과 가톨릭 교회를 위해 봉헌하며 말했다:
"제가 겪어야 할 고통을 교황과 교회를 위해 주님께 바칩니다.
"그의 마지막 병을 치료하던 의사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물었을 때
그는 "저보다 더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머니에게 한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 두려워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기에 죽음은 영원한 삶으로 가는 통로가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피할 필요가 없어요. 영원한 삶에서 비범한 것을 경험할 준비를 합시다."
아쿠티스의 마지막 소원은 아씨시에 묻히는 것이었다. 2019년 4월 6일,
그의 시신은 스폴리아치오네 성당으로 옮겨져 최종 안식처에서 공경받았다.
밤새 행렬은 산 루피노 대성당에 머물렀고,
교구 성가대는 이 행사를 위해 마르코 맘몰리가 특별히 작곡한 찬송가 "Non io, ma Dio"(내가 아니라 하느님)를 불렀다.
아씨시 거리에는 성물을 파는 가게들이 가득했다..들어가 봤지만 막상 사려니 살만한 것은 없어서 그냥 나왔다.
이제 드디어 성녀 글라라 성당에 왔다.여기서도 사진을 못 찍게해서 하나도 못 찍었다..
1194년, 이탈리아 움브리아 주 아시시 지방 귀족 파바로네 디 오프레두초 델리 시피
(Favarone di Offreduccio degli Scifi)의 장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탈리아어인 키아라(Chiara) 오프레두초이며, 널리 알려진 이름 클라라(Clara)는 라틴어식 이름이다.
1206년, 성 프란치스코를 만나 그의 설교에 감화되어 수녀의 길을 걷고자 했다.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원치 않는 결혼 직전까지 가지만, 탈출에 성공하여 성 프란치스코를 다시 만나 수도자의 길에 들어선다.
동생인 아녜스도 언니 클라라를 따라 수녀의 길에 들어간다.
훗날 자매의 어머니 오르톨라나(Ortolana)도 남편이 죽고 나서 두 딸을 따라 수녀가 되었다.
성녀 글라라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사진은 빌려 왔다.
그 후 산 다미아노 지방에서 철저한 금욕과 노동을 통해 자체적인 수입을 얻는 것 외에 아무런 수입을 얻지 않으려 하여
처음에는 오해를 받지만 이를 통해 프란치스코회의 규칙을 정리하는 등의 소득을 얻는다.
1224년, 영적 남편이자 스승인 성 프란치스코 수사가 병으로 선종하고, 그녀를 죽을 때까지 29년간 괴롭히는 지병을 얻는다.
그런 와중에도 수많은 규칙을 정립하여 회칙을 완성한 클라라는 1253년 8월 10일,
완성된 회칙이 가톨릭에 인준되는 소식을 듣고 하루 뒤인 11일에 선종한다. 향년 59세였다.
사후 2년 뒤인 1255년에 성녀로 임명되고 640년 뒤인 1893년에 그녀의 수의에서 초창기 회칙이 발견되었다.
다음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가 성당이다.
프란치스코는 부잣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날때 지나가던 순례자가 산고를 겪는 부인을보고
마굿간에 가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해서 마굿간에서 낳았다고한다.
그런데 그 순례자는 프란치스코가 세례를 받을떄도
성당에 왔다고한다 지금도 그 루피노 성당에는 돌이 하나 있는데 그 돌에는 마치 발자국 같은게 하나 있다.
안내자는 그 돌을 보여주면서 순례자로 가장한 천사가 프란치스코 세례때 그 돌위에 서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
하느님꼐서는 프란치스코를 미리 당신의 사람으로 정해 놓은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청년시절까지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전쟁에 나가게 되었는데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고한다.
감옥에서 나와서도 방탕했지만 내용이 달랐다..불쌍한 이들을 도와주고 허물어진 성당을 고쳐주고
아버지의 돈을 가져다가 그렇게 쓰고 다니니 장남인 프란치스코가 자기의 뒤를 이어 사업을 번창 시켜 주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프란치스코를 붙잡아다 집에 가두고 만다.
이렇게 작은 방에 가두어 두었다...하지만 아버지가 집을 떠나면 엄마가 풀어주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집을 나와 또 같은 행동을 하고 다니니 아버지가 화가나서 프란치스코를 재판정에 세우게 된다
프란치스코는 주교님과 많은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 아버지에게 주면서 이 옷도 아버지의
것이니 가져 가시라고 던져 주었다.알몸이 된 프란치스코를 주교님께서 망또로 감싸주시고 옷을 사서 입혔줬다는
일화도 있다...그렇게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 결별을 하고 오직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게 된다.
프란치스코 생가로 들어가는 문이다.
여기까지 보고 디오니님은 우리에게 자유시간을 주셨다...
형님과 난 자유시간에 마굿간부터 가 보았다...
골목끝에 아치형 문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프란치스코가 태어났던 마굿간이다.
이곳이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마굿간인데 이제는 기도하는 집이 되었다.
난 성지순례를 가기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라는 책을 사서 대충 읽고 갔기에 조금이나마 프란치스코에 대하여
알게 되었는데 이 마굿간도 마찬가지이다...난 프란치스코가 마굿간에서 태어 났다는 것이 참 궁금했으며
하느님꼐서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계속 했었다..
책에서 봤던 마굿간...디오니님은 거기에 대한 설명은 별로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아무것도 없었지만 그곳엔 프란치스코의 흔적이 남아있는듯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영혼이 이 기도의방을 온전히 감싸고 있는듯했다..마음이 고요해지면서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자유시간에 형님과 난 생가 마당에서 사진을 찍고 성물 가게들을 돌아보고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다른분들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걸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힘도 들었는데 앉아서 쉬니 그것도 좋았다.
순례는 걷는것이라고 디오니님은 말했지만 이 나이에 많이 걷는것은 무리인듯 싶었다..ㅎㅎ
자유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프린치스코 무덤이 있는 성당으로 갔다..
역시 사진은 찍을 수가 없어서 조용히 둘러보고 나왔다..많은분들이 조용히 앉아서 기도하고계셨다.
수도원 안의 모습이다...마당 가운데 우물이 있는것이 특이하다
프란치스코 성당에 올려다 보이는 아씨시...
우리는 미사를 드리러 보나벤뚜라 경당으로 갔다.
오늘의 마지막 순례는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많이 지쳐 있어서 미사 드리는것도 힘이 들었다...
신부님꼐서는 이날 미사 강론에 침묵에 대해 말씀하셨다..
첫날은 회개 에 대하여 둘째날은 멈춤에 대하여 말씀 하셨는데 오늘은 침묵이다
신부님의 강론이 이어지는 같은 느낌이 들었다..회개하고 멈추고 침묵하고...
우리들은 너무 침묵하지 못하는것이 문제인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부터도 침묵하는 것을 잘 못하는것 같다..그래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번 순례에서는 참 배우는것이 많은것같다..모두 다 마음에 새겨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미사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주차장으로 와서 버스를 타고 아래동네에 있는 체나콜로 숙소로 왔다..
이곳은 예전에 수도원이었는데 리모델링을해서 호텔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전 같지 않고 지금은 지원하는 수도자가 없어서 수도원도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것이 참 아쉬웠고 안타까웠다.
호텔이 넓고 주변 산책 코스도 좋고 조용하고 너무 좋았다...
저녁 식사시간에 사람이 몰려 시끄러웠던것 말고는 흠잡을데가 없었다..
시끄러워도 저녁을 맛있게 먹고 올라와서 종일 걸어서 피곤한 다리를 침대에 뉘이며
오늘 하루도 감사합니다...하고는 바로 잠이 들었다..
이번 순례 중에 오늘이 제일 힘들었던것 같다..ㅎㅎ
성지 순례를 하면서 힘들다고 하면 안되는데..성인들께서 들으시면 화내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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