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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여행이야기

성지순례 프랑스 루르드 열번째 열한번째날

언제:2018년5월24일 목요일

누가:원미동성당교우28명

어디에;프랑스 루르드


12시넘어서 잠이 들었으니 4시간 남짓 잠을 자고 4시에 서둘러 일어나서 마사비엘 동굴 앞으로가서 성모님께 조배를 드렸다.

오늘도 6시미사가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장소 마사비엘 동굴성당에서 있을 예정이다.

미사 전에 먼저 조배를 드리고 싶어서 일찍 일어났다.

조배 드리고 있는 도중 비가 한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그러나 괜찮을 줄 알고 우산을 안가지고 내려왔더니

비는 점점 더 많이 내렸다.


비가 쏟아져도 꿈적않고 우리는 미사를 드렸고 나는 영광스럼게도 이날 독서를 했다..

난 이곳에서 독서를 하고 싶었다...왜 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러고 싶었고 이루어졌다..

그렇게 독서만 하면 떨리던것이 이날은 하나도 떨지도 않았다.

성모님께서 함께 하셨고 또 성모님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독서를 하도록 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김춘은 아가다가 찍어 준 핸펀 사진이라 화질이 좋지가 않다..

그러나 참 감사한 사진이고 나에게는 귀한 사진이다...아가다에게 참 고맙다.


광주교구 한 본당의 순례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렸는데 그 쪽 신부님께서 미사집전을 하시고 강론은 우리 신부님께서 하셨다.




아침을 먹고나니 언제 비가 왔냐는듯이 날씨는 화창하게 개었다...

우리는 부지런히 아침을 먹고 침수장소로 제일 먼저 갔다...9시부터 침수가 시작된다고 미리가서 기다리고있어야 한다고

안내하시는 수녀님께서 말씀 하셨다..


우리는 수녀님의 안내로 침수 장소로 갔고 한시간 남짓 기다림끝에 침수를 할 수 가 있었다..

말할 수 없이 은혜로운 시간이었다...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떄의 일이 떠 올라 눈물이 난다.

침수하고나서 울고 있는 나를 감싸 안아 주시던 그 이름모를 외국인 봉사자의 품을 잊을 수 가 없다..

계속 울고 있는 나를 끝까지 안내해 주며 웃음으로 배웅해 주던 그 봉사자를 잊을 수 가 없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는데 신부님께서 두팔을 벌리고 서 계셨다..

난 달려가 신부님 품에 안겼다..그 순간은 창피한것도 몰랐다 ,,,신부님의 품이 그저 성모님의 품처럼 크고 따뜻하게 느껴져서 한참을 울었다.

눈물이 말라 있던 내가 이제 드디어 울음이 터진 것이다...회개의 눈물이며 은총의 눈물이었다..

그 은총의 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루르드의 성모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려 했으나 그 순간은 모든것을 잊게 했으며 그냥 눈물만 났다.

이곳에는 침대에 누운 환자와 휠체어를 타고 치유의 기적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그 사람들을보며 어찌 내가 치유의 은총을 청할 수 있겠는가...난 아픈것도 아니었다.


난 그동안 아팠다고는하나 그 아픈 순간도 모두 은총의 순간이었다는 깨달음이 왔다. 하느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매순간 모든것에 감사하며 사라아 갈 수 있을것 만 같았다.




1858년 2월 11일,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빵과 물물교환을 하려고 투아네트, 잔 아바디 등 또래의 다른 두 소녀와 함께

약간의 땔나무와 수프 재료로 쓰일 살이 조금 붙은 뼈 등을 채집하러 돌아다녔다. 마사비엘 동굴 근처에 있는

가브 강을 건넌 두 소녀를 따라 베르나데트도 강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었을 때, 폭풍우 같은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강변의 나무와 수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동굴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발끝까지 내려온 하얀 드레스에 하늘색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베일로 머리와 어깨를 덮었으며 팔에는 묵주를 두르고 있고 발아래에는 노란 장미가 있는 모습을 한 여인이 나타났다.

베르나데트는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 기도를 바쳤다.

베르나데트가 묵주 기도를 끝마치자, 여인은 베르나데트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순식간에 사라졌다.


베르나데트는 이 일을 자기만이 아는 비밀로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귀가하던 도중에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여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으나 그 비밀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그녀의 부모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부모의 힐문을 받고서 그녀와 그녀의 누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체벌을 받았다.

3일 후, 베르나데트는 다른 두 명의 소녀와 같이 동굴을 다시 찾았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르나데트가 탈혼 상태에 빠진 것에 놀라 두 소녀가 몹시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녀들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베르나데트는 아직도 황홀경이 없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침수가 끝나고 우리는 수녀님과 함께 벨라뎃따 기념관을 다니며 설명을 들었다.


2월 18일, 그녀는 부인에게서 “너는 앞으로 2주 동안 매일 이 동굴에 오너라.”라는 말을 들었다.

부인은 이어서 “나는 너에게 이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지 못하지만 다음 세상의 행복은 약속 하마.”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경찰과 시 당국까지 포함한 지역 전체의 관심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부모와 경찰은 베르나데트가 더는 마사비엘레 동굴로 가지 못하도록 조치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계속 동굴을 찾았다.


2월 25일, 부인은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며 베르나데트에게 가서 마신 다음에 씻으라고 지시했다.

베르나데트는 부인이 지시한 대로 손으로 땅을 깊이 파헤친 후 그 물을 마시고 목욕하였다. 

그러자 깨끗한 샘물이 갑자기 엄청난 양으로 나왔다. 이 소식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서, 온갖 종류의 병을 앓는 환자들이 대거 몰려와

 이 샘물을 마시거나 몸에 뿌렸다. 그 후, 많은 기적 치료가 보고되었다.

그들 가운데 7명은 1860년 베르게 교수에 의해 어떠한 의학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샘물을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된 것으로 인정받은 첫 번째 환자는 사고 후 오른손이 기형으로 변한 여성이었다


'기적의 샘물'로 불리는 프랑스의 루르드 샘물, 이곳에 연간 수천, 수만 명의 발걸음이 몰려든다.

이유는, 알 수 없는 효능 때문! 어떤 치료를 해도 낫지 않던 질병이 이곳 샘물에 몸을 담그거나 물을 마신 후 완치되는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

 실제 의료검증국의 철저한 검증을 거쳐 '기적의 치유 사례'로 꼽힌 것만 68건에 이른다.

그런데, 191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알렉시스 카렐 박사의 연구결과,

이 루르드 샘물엔 놀랍게도 '게르마늄'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군중의 수가 점점 많아지자 프랑스 정부는 루르드를 점차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결국, 정부는 동굴을 울타리로 막고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한 다음 누구라도 이곳에 접근하는 자는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루르드는 어느새 프랑스의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동굴은 나폴레옹 3세 황제의 개입으로 1858년 10월 4일에 다시 일반에 개장되었다.

이와 같은 논쟁에서 교회는 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로 하였다.

3월 25일, 밤중에 베르나데트는 어둠을 틈타 동굴에 겨우 도착하였다.

동굴 주위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가브 강가에 무릎을 꿇고 동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베르나데트는 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부인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부인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마침내 네 번째 물음에 그녀는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는 부인의 대답을 들었다.

 

4월 7일 일요일 부활절 날, 베르나데트를 관찰한 의사는 그녀가 탈혼 상태에 빠졌을 때, 촛불에 손을 뻗었는데도 화상을 전혀 입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7월 16일, 베르나데트는 동굴에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부인의 미소를 보고 감탄한 그녀는 나중에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라고 회고했다.




지금까지 모든 과정 동안,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교회는 전국적인 질문들에 직면하자,

1858년 11월 17일에 루르드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발족하기로 하였다.

1860년 1월 18일, 지역 교구장은 “동정 마리아께서는 참으로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나타나셨다.”라고 발표하였다.


오늘날 루르드는 파티마와 더불어 성모 공경의 근거지로서, 매년 세계 각국에서 4-600만 명의 순례자가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순례지 가운데 한 곳으로 자주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다.

근래의 교황들 역시 루르드를 자주 방문하였다.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 요한 23세는 주교 시절에 루르드를 찾아왔으며, 비오 12세는 교황 사절 때 루르드를 찾았다.

비오 12세는 또한 루르드의 성모 발현 100주년을 기념해 회칙 《루르드의 성지 순례》(Le Pelerinage de Lourdes)를 발표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루르드를 총 세 번 방문하였다.

베네딕토 16세는 2008년 9월 15일 루르드의 성모 발현 150주년을 맞아 루르드를 찾아 미사를 거행하였다.



원죄없으신 성모님
















점심을 먹고 난후 벨라뎃따 가 살던 방앗간과 까쇼 감옥엘 갔다.

수녀님께서는 까쇼 감옥에서 벨라뎃따의 감사기도를 읽어주셨는데 그 기도문을 들으면서 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내가 살아 온 날들이 너무나 죄송해서 눈물이 자꾸만 났다.

바보처럼 살아 온 내가 후회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벨라뎃따가 다니던 루르드 본당에 모셔져 있던 성모님이다.




벨라뎃따의 가족들..




그리고는 성체 강복이 있었는데 우리나라도 태극기를 들고 참여 했다.



난 미리 성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신부님께서 성체 강복을 하러 다니시는데 바로 내앞에 오셔서 성체 강복을 해 주셨다..

생전처음 성체 바로 앞에서 강복을 받아봤다...에수님께 강복을 받았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밖에 따라가지 않길 잘했네..남아 있던 우리는 모두 기뻐했다...ㅎ



저녁을 먹고 9시부터 야간춧불행렬이 있었는데 묵주기도를 함께 하는 행렬이었다..성지 마당을 한바퀴도는 행렬이었다.

그런데 소매치기 너무나도 많았다...우리 일행중에도 한분이 소매치기를 당하셨다..

여권을 잃어 버리셨는데 대표님이 금방 손을 쓰셔서 집에 돌아오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다행이었다.



촛불행렬에도 우리팀은 태극기를 들고 참여했다.



촛불 행렬이 끝나고 나니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행렬이 끝난 후 집에 가져 올 기적수를 떠 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도 일찍 일어나야 했으므로 조금이라도 빨리 자야했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씻고 바로잤다....

잠이 부족하니 이젠 누우면 골아떨어졌다..ㅋ


2018.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