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양림에서 마지막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자 우린 또다시 아쉬움을 이야기하며
천천히 일어나 아침을 먹고 다시 밥을 지어 도시락을 준비했다.
공산성에 올라가서 먹을요량으로..
이렇게나 알뜰하다니..ㅋㅋ
공산성은 수묵원에서 약 11키로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차로는 약10분정도 걸렸다..
영화촬영지였다는 표시도 있고..
공산성의 매표소..입장료는 1,500원이다.
공주시 산성동소재 사적 제12호
문주왕 원년(475) 한성 위례성으로부터 이곳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겨
삼근왕,동성왕,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에 사비(부여)로 옮길때까지
5대 64년간 백제의 중심지인 웅진성(공주)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산성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왕성)이다.
금서루가 올려다 보인다.
금서루는 4개의 성문 중 西에 설치한 문루로 문루 흔적만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성내로 진입하는 차도로 이용되다
1993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성곽의 사방에 동쪽 영동루, 서쪽 금서루, 남쪽 진남루,북쪽 공북루의 문루가 남아 있고
성내에는 임류각, 연지(2개),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영은사, 군창지 명국삼장비 등이 있다
처음 시작은 성곽으로 올라가지 않고 안쪽으로 걸었다...성을 안바퀴도는 거리는 2,6키로 라고
해설사가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걷다보니 너무 심심해서 성곽으로 올라가서 걷기 시작했다..
성곽은 햇빛이 내려쬘 줄 알았는데 나무가 우거져 전혀 햇빛이 들지를 않았다.
진작 이쪽으로 올걸...하며 우린 웃었다.
성곽의 담을 타고 담쟁이가 이렇게 위쪽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 성곽 남쪽문이다..
우린 이곳에서 자리를 깔고 점심을 먹었다...사 먹는밥보다 훨씬 맛있다고 하면서..
유형문화재 37호 .
여행객들이 공산성을 찿았을때 오늘의 공산성 모습을 보고 우리가 걸어 들어오는 서문인 금서루를 정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이지만 공산성의 북문이면서 실제 정문은
공복루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금강철교(금강교)가 가설되기 전까지는 조선시대 한양과 호남지역을
오갈때 유일한 내륙교통의 거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출입문이다 공북루를 나서면 금강을 건너는
나루가 있었고 걸어서 천안 차령산맥의 관문인 차령을 넘어 서울로 향할수 있었다고 한다 <택리지>에는
조선 선조 1603년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현종 4년(1663년)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기록은 송시열이 하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금강은 비단처럼 아름답다 하여 [錦江-비단강]이라 하였다.
금강은 한강과 낙동강에 이어 남한에서 세번째로 큰 강이다 금강은 하구기 넓고 깊어 내룩수운이 발달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철도 교통이 발달 하기전에 강경까지 큰 배가 자유로이 운항했으나 지금은
뱃길이 끊긴지 오래다 백제는 항상 고구려의 남침을 경계하여 위례성은 한강을 북쪽에 두었고
공주에서는 금강을, 부여에서는 백마강을 북쪽에 두는 방책을 유지하였다
힘들게 걷던 우리는 한순간에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바람이 불어와 시원하지 경치 멋있지...
우린 이곳에서 한참을 쉬었다...그리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홍북루이다..
금강의 연안에 자리잡은 누각과 정자들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했던 시인묵객들 중
조선 선조 때 충청감사 유근은 공산성의 공북루에 올라 시 한귀를 짓기를
소동파는 적벽강에 놀았으나
나는 지금 창벽에 놀고
유양은 남루에 올랐으나
지금 나는 북루에 올랐노라.
라고 읊고 있다. 금강의 창벽을 소동파가 놀았다는 적벽강에 비유하고, 유양은 남루에 올랐지만
지금 자기는 공산성의 공북루에 올라 금강의 승경에 도취해 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영은사는 전통사찰 2호로 조선 세조 4년(1458년)에 세워진 사찰이다.
묘은사로 불렀다가 이괄의 난 (1624년)떄에 이 절에 피신한 인조가 은적사라 하였다가
다시 영은사로 고쳤다. 원통전 내부에는 목조관음보살돠상이
모셔 있으며 청동법종, 아미타후불탱화, 칠성탱화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저 꼭대기 올려다 보이는 진남루
공산성 남문인 진남루는 공산성 성문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성문으로 보이며
조선시대 삼남의 관문이었으며 1948년 붕괴 된것을 1970년대에 해체복원 하였다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석성으로 바꾸어 만든 성문으로 공주 시가지와 통하는 길이 진남루와 연결되어 있다
1932년 일제 강점기때 도청소재지를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기게된다
한때는 찬란한 백제문화의 중심지였고 조선시대에는 정치행정의 요지였던 공주가
도청소재지를 갑자기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 버렸을때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
그런 공주 시민들의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해서 세웠다는 금강대교를 바라보면서 발길을 돌렸다
내려다 보이는 홍북루..정화는 여기서 바로 금서루로 질러서 가고 우린 진남루로 올라갔다..
경사가 가파라서 정화는 겁을 냈다.
진남루를 거쳐 다시 금서루로 돌아왔다..
정화가 매표소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공산성을 둘러보고 우린 다시 무령왕릉으로 발길을 돌렸다.
햇빛이 얼마나 뜨거운지 주차장에 도착하니 숙이랑 정화는 그늘에서 놀고 있겠단다..
할수없이 남편과 나만 무령왕릉으로 갔다.
입장료는 1,500원이다.
매표소 가는길에 코스모스가 내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또 한컷..
무령왕릉 (武寧王陵)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7번째 발견된 고분이며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이다.1971년 7월 7일처음 발굴되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에 기준자료가 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엽형이식(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옛지명 : 송산리)이다
송산리 고분군이다..
일제 강점기때 일본놈들이 훼손을 시키고 문화재를 모두 훔쳐 갔다고한다.
이곳이 무령왕릉이다.
공개를 했었는데 자꾸만훼손이되어 영구 비공개로 하기로 헀다고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모형전시관을 만들어 놓았는데 정말 잘 만들어 놓았다.
왕릉을 축조하는 모습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에 있는 왕릉. 1971년에 발견, 1972년 7월에 발굴. 묘실 선도(羨道)에 놓인 2개의 묘지석(墓誌石)에 의해서,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526 사망)의 합장릉임이 판명되었다.
횡혈식 전축(塼築)묘로 현실은 폭 2.72m, 안길이 4.2m, 높이 2.93m. 안쪽에 관대(台)가 있고 왕과 왕비의 목관이 나란히 있었다.
왕의 금제 관식(金製 冠飾) ∙ 귀걸이 ∙ 은제 과대(銙帶), 요패(腰佩), 왕비의 금제 관식 ∙ 비녀 ∙ 귀걸이 ∙ 목걸이 ∙ 팔찌 등의
장신구들이 원위치대로 출토. 중요한 부장품은 방격규구(方格規矩), 사신경(四神鏡), 수대경(獸帶鏡), 환두대도(換頭大刀),
청동잔(盞), 금동장식의 신, 백자 등잔, 도제(陶製)의 육이호(耳壺), 목침, 나무다리 시렁, 석수(石獸) 등. 묘실 구조,
전(塼)의 문양, 감경(鑑鏡), 도기 등에는 중국 남조의 영향이 보이지만 황금제 장신구에는 신라의 고분 출토품과 공통점이 있어
토착문화와 외래문화와의 융합을 보여주고 있다.
1971년 7월 7일부터 동년 10월 2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됨으로써 그 전모가 드러났다.
송산리(宋山里)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분구(墳丘)는
지름 약 20m의 원형(圓形) 플랜을 가지며 널방[墓室]의 바닥면에서 분정(墳頂)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문전(蓮華文塼)·문자전(文字塼) 등으로 쌓여진 단실묘(單室墓)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軸線)을 둔다
왕릉 내부의모습을 재현해 놓은것이다.
이곳은 발굴당시의 왕릉 내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 해 놓았다.
백제의 제 25대왕인 무령왕릉은 한국 고대 무덤 중에서
확실하게 주인이 밝혀진 유일한 무덤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무덤은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천마총, 장군총등의 이름이 붙여졌는데
무령왕릉은 확실하게 무령왕의 유물들이 발굴됨으로써 주인이 밝혀진 역사적으로 가치있는 무덤이다.
이곳에서 느낀 점은 정말 지금부터 1500년전의 의상이나 장신구가 현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고
왕의 무덤이 지금의 무덤의 설계보다 더 정교한 문양에 놀랐다.
그리고 관은 금송이라는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일본으로부터 가져온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고
이 당시 백제의 국제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도 느꼈다.
왕릉에서 나와 1키로 떨어진 황새바위성지를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우린 ㅈ비으로 돌아왔다.
숙이를 데려다주러 인천을 가서 칼국수로 저녁을 먹고
정화 데려다주고 우리도 집으로 왔다..
2박3일의 짧았지만 행복하고 보람있고 즐거운여행이었다.
여행은 언제나 이렇게 즐겁다.
물론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못자는 내습성 때문에 고생은 좀 하지만
그래도 여행이 좋아서 그런것쯤은 신경 안쓴다..
1년에 한번하는 남편과의 여행 이번에도 좋았다..
2012,09,12....계절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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