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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연풍성지













박해가 계속되던 시절.
연풍의 산간 지역은 신앙을 지키려는 선조들이 문경 새재와 이화령을 넘어 경상도로 피신하는 길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연풍에 도착해서 한숨을 돌렸고,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고개를 넘는 순간에도 틈틈이 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최양업(토마스) 신부님과 프랑스 선교사 칼래(강 니콜라오) 신부님도 연풍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면서 교우촌을 순방했습니다. 그럴 때면 신부님들은 연풍 골짜기에 숨어살던 교우들을 방문하여 비밀리에 성사를 주었습니다.
이내 연풍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신앙을 잇는 교차로가 되었고, 신앙 선조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수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체포되어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연풍 병방골(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은 황석두 루가(1813~1866) 성인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연풍 성지는 성인의 묘소를 모시고 있는 곳입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성인은, 부친께서 천주학을 버리든지 작두날에 목을 맡기든지 하라고 강요하자 결코 진리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작두날에 목을 디밀었습니다. 이후 성인은 아내와 동정 부부로 살면서 일생을 교회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다가 병인박해 때 다블뤼(안돈이 안토니오) 주교님, 오메트르(오 베드로)와 위앵(민 루가) 신부님, 장주기(요셉) 회장님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성인의 시신은 갈매못에서 홍산 삽티(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 병방골로 이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노력의 결과 1979년에는 그 묘소가 발견되어 3년 뒤 연풍 성지로 천묘되었습니다.





작두날로도 막지 못한 황 루가 성인의 신심.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일생을 교회에 바쳤던 헌신적인 삶.
일찍이 성인의 이러한 열심을 알아챈 프랑스 선교사들은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여 곁에 두었습니다. 이후 성인은 선교사들에게 한글과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고, 선교사들의 교우촌 순방에 함께 했으며, 다블뤼 주교님을 도와 한글 교리서들을 편찬했습니다. 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님의 말씀대로 성인은 조선교구에서 가장 훌륭한 회장이었습니다.
언제나 신망애 삼덕과 기도 안에서 살았던 성인은 주교님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포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자수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순교의 용덕을 보여주면서 즐거운 낯빛으로 휘광이의 칼날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평소에 원하던 대로 이 세상에서의 과거 대신 천상의 과거에 합격한 것입니다.


자료제공:연풍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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