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찰,한옥

경복궁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근정전은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건축물로

왕과 나라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는 경복궁의 상징적 공간이다.

듬직한 월대 위에 한껏 날개를 편 듯한 팔작지붕이 더없이 아름답고 품위있다.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중에서

 

 

근정전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보통 품계석을 따라 난 어도를 밟고 곧장 월대로 오르지만

근정문 행각 오른쪽 모서리로 가서 바라보아야한다.

왜냐하면 거기가 바로 근정전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면 북악산과 인왕산을 양옆에 끼고 듬직한 월대 위에 한껏 날개를 편 근정전 팔작지붕이 더없이 아름답고 품위있게 보인다.

 

사진에서 보이는 바로 이자리에서 바라보아야

근정전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왕의 침소 강녕전

 

왕은 곧 용을 상징하는데 또 하나의 용이 있으면 안된다 하여

강녕전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단다.

 

 

 

 

경복궁의 마지막 건물 왕비의 침소 교태전

이 곳에도 역시 용마루가 없다.

 

 

 

 

'교태전 뒤쪽으로 돌아서면 홀연히 아름다운 꽃동산이 나타난다.

아미산 화계(花界)라 불리는 이 꽃동산은

경회루에 연못을 만들면서 퍼낸 흙을 모아 가산을 만들면서

네 개의 꽃계단으로 축조한 것이다.'

 

 

 

'교태전의 화계가 아름다운 이유는 세 번 째 단에 아름다운 네 개의 굴뚝이 줄지어 있어

환상적인 공간을 이룬 것이다.

교태전 구들의 굴뚝을 이렇게 멀리 빼내어 골칫거리 건축 장애물을

또다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경복궁 자체가 국가 사적임에도 이 굴뚝들을 보물 제811호로 별도 지정해 놓았다.'

 

- 유홍준 문화유산답사기 6권 '인생도처유상수'에서 발췌 정리

 

 

향원정은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있는 향원지 내의 가운데 섬 위에 건립된 육각형의 정자이다.

향원지의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으로 북송대 학자 주돈이(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말로서

왕이나 왕족들이 휴식하고 소요하던 침전의 후원으로 여기에는 향원지(香遠池)와 녹산(鹿山)등 원림 (苑林)공간이 된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
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향원정 :경복궁 안에 있는 2층 정자.

고종이 건청궁(乾淸宮 :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에 기거하던 1867년

 경회루 서북쪽에 연못을 파고 그 중앙에 지은 것이다.

건청궁과 향원정 사이에 다리를 놓아 취향교(醉香橋)라 했는데,

이 다리는 6·25전쟁 때 파괴되고 현재의 다리는 1953년 남쪽에 새로 놓은 것이다.

 정자는 정육각형으로 장대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1·2층을 관통하는 육각기둥을 세웠다. 1

층에는 평난간을, 2층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있다.

 겹처마이며,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지붕의 중앙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어 치장했다

 

 

 

 

 

 

건청궁이 건립된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생활 공간을 옮겼으며

1885년에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1896년 아관파천 때까지 10년간을 줄곧 이 곳에서 지냈다.

 

                       건청궁은 1887년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며

1895년 명성황후가 옥호루에서 일본인 자객들에게 시해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건청궁은 고종이 궁궐이 내탕금으로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궁궐 속의 궁궐입니다.

일반 사가와 같이 사랑채, 안채,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고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함이 친근함으로 다가오는 곳입니다.

고종은 이곳에서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조선에서 전기가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 이곳 건청궁입니다.

하지만  출발이 너무 늦었을까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왕후마져 잃게 되는 슬픈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1896년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고 난뒤 이곳은 일본에 의해 철저히 훼철되었다가 최근에 일반에게 공개되었습니다.

공녕합과 옥호루에서는 일본 만행 앞에서도 당당했을 명성황후의 모습을 떠오르게 되네요.

향원정과 건청궁은 경복궁 깊숙한 곳에 있어 다른 곳 보다 찾는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아니면 관리가 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창건된 것은 1395년, 이때 경회루 주위에 작은 연못이 조성되었고,

1412년(태종 12) 태종의 명에 의하여 큰 방지를 파고 경회루를 창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서 273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방지의 크기는 동서가 128m, 남북이 113m인데,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잔치를 베풀던 경회루

 

'경복궁 건축미학의 극치, 경회루는 경복궁 건축의 꽃이다.

경회루 건축에서 가장 슬기롭고 경이로운 부분은 이 연못물의 순환시스템이다.

어떤 강제 순환 장치 없이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연못 전체를 돌아나감으로써

항상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전통적으로 연못에 물을 넣는 방법은 세 가지 기법이 있는데 경회루 연못은 그 기법이 다 적용되었고  

북쪽과 동쪽의 용머리 조각상에서 두 줄기의 물길이 흐르고

북쪽 못바닥에서 지하수가 흘러들어오니 모두 세 물줄기가 흐르며

동쪽 물줄기는 다리에 부딪치고 북쪽 물줄기는 만세산이라 불리는 두 섬에 부딪쳐

호안을 따라 흐르다가 서남쪽 출수구로 빠져나가는데

입수구가 있는 북동쪽이 약간 높고 출수구가 있는 서남쪽이 약간 낮아

이 기울기가 물의 흐름을 유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 유홍준 문화유산답사기 6권 '인생도처유상수'에서 발췌 정리

 

2013,5,11.토....계절그리기

'.........사찰,한옥'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전산 금둔사  (0) 2015.03.11
낙안읍성의 풍경  (0) 2015.03.11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  (0) 2013.05.07
수원 화성에서..  (0) 2013.05.07
경주 요석궁  (0) 2013.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