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그리기. 2021. 1. 10. 14:43

자화상

 

유안진(1941~)

 

 

한 오십년 살고 보니
나는 나는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비와 이슬이 눈과 서리가
강물과 바닷물이 뉘기 아닌 바로 나였음을 알아라

 

수리부헝이 울어대는 이 겨울도 한 밤중, 뒷뜰 얼음 밭을 치달리는 눈바람
에, 마음 헹구는 바람의 연인, 가슴속 용광로에 불지피는 황홀한 거짓말을,
오오 미쳐볼 뿐 대책 없는 불쌍한 희망을, 내 몫으로 오늘 몫으로 사랑하여
흐르는 일

 

삭아질수록 새우젓갈 맛나듯이, 때얼룩에 쩔을수록 인생다워지듯이, 산다
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때 묻히고 더럽혀지며, 허상에 넋을 잃어 진실을
놓치며, 죄업에 혼이 빠져 정직을 못 가리며, 어디론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나란히 누웠어도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끊임없이 떠나고 떠도는 것이다, 멀
리 멀리 떠나갈수록, 가슴이 그득히 채워지는 것이다, 갈 데까지 갔다가는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만이 살 곳은 아니다, 허공이 오히려 더
살만한 곳이며, 흐르고 떠도는 것이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
문득 뒤 돌아다 보니
나는 나는 흐르는 구름의 딸이요
떠도는 바람의 연인이었어라.